현재(작금)의 예술은 고정된 장르가 없다.
여러 장르들이 섞이고 교차되고 작가들 스스로도 그러한 것에 얽매이기 보다는 자신의 영역을 더
넓히려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책들은 그러한 상황을 수용하기 보다는 뭉뚱그려 현대미술 소개니 유명 작가에 대한 소개 혹은 외국 미술관 탐방...의 형식을 통해 이러한 변화하는 예술의 일면을 소개하는데 그치고 있다.
이 책은 그렇고 그런 (그동안 많이 보아왔던) 책들에 싫증을 느끼던 차에 집어 든 책이다.
비교적 다양한 방면? 장르에 대한 소개가 소개되어 있어 그동안 산발적으로 접했던 예술가들의 작품이 하나로 정리되는 듯 하기도 하다
그러나 사실 책 덮고나니...난 또 그것들을 잊어버린다.(이건 전적으로 내 문제!ㅎㅎ)
<출판 서평>
텔레비전, 라디오, 비디오, 컴퓨터, 사진 등 새로운 매체를 활용하여 현대사회와 인간을 표현해 내는 미디어아트. [미디어아트는 X예술이다] 는 전통예술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예술인 미디어아트의 예술세계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미디어아트가 작품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구체적인 주제들을, 작가들의 작업과 함께 살펴보고 있다. 모두 39개의 단편적인 비평문들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마치 콜라주 작품처럼 미디어아트의 본질, 작품이나 작가, 특정한 예술 경향 등을 포함하고 있는 다양한 내용의 글들이 모여 미디어아트가 무엇이다라는 큰 그림을 보여준다.
애초에 총체적이고 공감각적인 일상의 체험에서 분리되어 한 감각만을 기형적으로 극대화하려는 장르화된 전통예술의 패러다임을 넘어서는, 기존 개별 장르의 규칙들로 설명할 수 없는 미지의 ‘X예술’. 전통적인 예술의 규칙에 적용하면 예술이 아닌(X) 예술. 과학적 공학적 지식과 예술적 감성을 통합하며 기존의 예술로는 불가능했던 것들을 표현해 내는 예술. 관행적으로 굳어진 이데올로기의 환상을 거침없이 파괴하는 예술.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잠재된 영역을 탐구하는 예술. 예술과 일상의 간극을 허물어트리려는 예술……. 이러한 시도들이 미디어아트가 단순히 새로운 예술이 아닌 전통예술과는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제안하고 있는 예술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미디어아트의 문제의식과 철학적 미학적 담론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가며, 미디어아트에서 다루고 있는 거의 전 분야를 종횡무진 누비는 본격적인 미디어아트 비평서이다.
미디어아트의 예술세계 그리고 새로운 예술적 가능성으로서 미디어아트
물고기 형태의 다이어그램으로 디자인한 것을 컴퓨터 절삭 등을 통해 시공한 디지털 건축물(프랭크 게리의 구겐하임 미술관), 기계 작동으로 마치 우산처럼 펼쳐지는 드레스(후세인 샬라얀의 패션), 현대 수학의 난해한 프랙털 이론을 컴퓨터로 이미지화한 작품(클리퍼드 픽오버의 [텔로포다이트 프랙털 1]), 음악에 맞춰 영화처럼 화면의 글자가 깜빡거리거나 클로즈업, 암전되는 타이포그래피 시(이희복의 [SKY]), 죽은토끼가 부패되고 결국 뼈마저 없어지는 과정을 몇 분으로 압축하여 보여주는 동영상(샘 테일러우드의 [작은 죽음]). 움직임 기록장치와 GPS 장치가 내장된 여행용 트렁크를 끌고 다니며 장소의 소리를 담는 퍼포먼스(이언 모트의 [사운드 매핑: 장소의 확정])…….
모두 컴퓨터나 텔레비전, 라디오, 비디오, 사진 등 현대의 뉴미디어를 활용하여 작업한 미디어아트(media art) 작품들이다. 과학적 공학적 기술의 발전으로 탄생한 뉴미디어는 현대 커뮤니케이션의 주요 수단으로서 상호작용적이며, 대중적이고 때로 상업적이다. 또한 저장을 통해 무한 반복과 재생이 가능하고, 원형을 얼마든지 변형할 수 있다는 특징을 지닌다. 이러한 미디어를 기반으로 하는 예술인 미디어아트가 기계작업과 수작업을 섞어 치밀하게 제작된 제품에 가깝고, 데이터만 있으면 얼마든지 재생산이 가능하고, 관객이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으므로 개방적인 성격을 지니는 건 당연한 일이다.
미디어아트는 “예술이란 천부적 재능을 지닌 천재의 예술이라는 칸트의 예술론이나 예술작품은 감성적 형식으로 구현된 절대이념이라는 헤겔의 가르침”(/ p.5)이라는 전통의 예술관을 만족시키는 예술이 아니다.어쩌면 전통적인 미학적 가치기준으로 볼 때 미디어아트 작품은 고작 허접한 기계 덩어리나 유치한 게임, 혹은 다소 기괴한 설치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예술이 더 이상 어떤 구원이나 지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 p.17)다. 예술과 일상의 간극이 허물어지고, 딱히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의 구분에 엄격하지도 않다. 그림 그리는 지능형 로봇(아츠봇)을 제작하여 작품을 만들게 하는 한 미디어아트 작업은 오히려 인간이 대단한 것으로 여겨왔던 예술 행위들 자체가 특별한 어떤 것도 될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기까지 한다.
이처럼 예술에서 “새로운 매체는 단순히 새로운 표현 수단의 등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예술 자체의 근본적인 변화와 맞물려 있다”(/ p.5). “예술작품이란 예술가가 이미 완성해 놓은 완결된 작품이라는 생각 자체가 무의미해졌으며, 기술적인 이유에서 관객에 의해서 얼마든지 변형이 가능하게 되었다. 아도르노의 표현을 빌리자면 예술작품의 의미가 예술가의 정신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예술의 자명성이 위협받게 된 것이다. …예술가와 예술작품의 관계, 예술작품과 관객의 관계, 나아가 예술가와 관객의 관계에서 근본적인변화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p.6)
[미디어아트는 X예술이다](박영욱 지음, 향연)는 전통예술과는 다른 새로운 예술인 미디어아트의 예술세계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미디어아트가 작품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구체적인 주제들을 작가들의 작업과 함께 살펴본 39개의 단편적인 비평문을 모은 글들이다. 전반적으로 미디어아트의 예술세계, 작품이나 작가,특정한 예술 경향 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 책에 수록된 모든 글들에 나타난 관심사는 바로 미디어아트가 제시하는 새로운 예술적 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미디어아트가 단지 새로운 예술이 아닌 전통예술과는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제안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미디어아트가 제안하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모습 혹은 예술에 대한 새로운 정의들 중에는 이미 과거의 예술에서 시도된 것도 있다. 그러나 미디어아트는 그 시도들을 구체화하기도 하기도 하며 또 넘어서기도 한다. 미디어아트의 예술사적 의의는 분명 과거의 예술의 관행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제안한다는 데 있”(/ p.7)기 때문이다.
주로 미디어아트가 추구하고 시도해 온 작업들은 다음과 같다.
뉴미디어를 통해 과거의 전통예술에서는 불가능했던 것들을 표현해 낸다. 가령 바니타스 정물의 시간적 소멸을 비디오카메라로 찍은 동영상을 통해 압축적으로 보여주거나(샘 테일러우드의 [정물], [작은 죽음]), 화선지의 전통회화들을 액정화면에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시키고(이이남의 [8폭의 디지털 병풍]), 시간의 다양한 공존을 분명하게 구현해 낸다(댄 그레이엄의 [시간이 지체된 방]).
관행적으로 굳어진 이데올로기의 환상을 걷어내준다. 디지털 사진의 의도적인 변형작업으로 사진이 진실성을보장한다는 환상을 파괴하고, 사진이 진실한 매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희화화하며(페데로 마이어의 [체 게바라와 5달러 지폐]), 원형과 매개변수로 이루어진 디지털 매체의 자유로운 변경을 통해 단 하나의 얼굴, 혹은 기호로서의 얼굴은 유형학이 만들어낸 허구임을 폭로하는(이레네 크리히바움의 [페이솔로지) 작업들이 그러하다.
또 애초에 총체적이고 공감각적인 일상의 체험들로부터 분리되어 한 감각만을 기형적으로 극대화하려는 장르화된 기존의 예술 패러다임을 거부한다. “과거의 매체는 단일한 장르에 국한이 된 것이었다. 가령 유화나 캔버스는 오로지 시각적 이미지를 담는 매체였을 뿐 그 속에 소리를 담을 수는 없었다. 음악의 경우에도 악기는 오로지 소리라는 청각 현상만을 만들 뿐이었다. 그러니 음악은 오로지 귀를 위한 예술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텔레비전이나 다양한 영상기기 혹은 컴퓨터와 같은 디지털 매체는 이미 처음부터 이미지와 소리가 결합이 되어 있다. 그것은 소리만을 위한 매체가 아닌 것이다. 미디어아트는 당연히 이미지와 소리의 엄격한 구분에 바탕을 둔 기존의 예술 규칙을 위반할 수밖에 없다.”(/ p.204) 예를 들어 사진이나 영화뿐 아니라 미디어를 활용하여 바그너의 총체예술작품을 구현하고자 한 모호이너지의 작업이나, 전통적인 음악이나 회화도 아닐뿐더러 단순한 퍼포먼스도 아니고 마치 이 모든 것들이 아예 하나의 작업으로 결합되어 음악은 소리의 예술이며 회화는 시각 이미지의 예술이라는 도식을 거부하는 사운드아트의 작업들은 여러 개의 장르들이 혼합된, 어떤 장르에도 가둘 수 없는 이질적인 예술을 만든다.
그리고 인간의 잠재된 능력의 확장 가능성을 실험한다. 로이 애스콧 등 미디어아티스트들은 상호주관적인 네트워크에 주목하며 네트워크와 소통의 범위를 영적인 범위로까지 확장하고자 하였고, 디지털 매체를 통하여 타자의 지각과 공감함으로써 개별적 몸을 넘어선 공동의 몸 틀을 형성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준다(스텐슬리와 울퍼드의 [인터스킨 시스템]).
그 밖에도 미디어아트는 대중매체의 부작용에 대해 고민하고 사회를 비판하는 등 현실 참여적 경향 띤다. “미디어 자체가 사르트르의 응시나 뒤샹의 관음증적 시선을 본성으로 지니고 있음을 폭로하고 있다. 사람들이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미세한 곳까지 닿고자 하는 미디어의 관음증적 시선은 거꾸로 사람들 자신을 항상 감시하는 응시의 눈초리를 띠고 군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응시의 눈초리가 바로 미디어 시대의 팬옵티콘일지도 모른다”(/ p.118)는 모리스 베나윤의 [워치아웃] 같은 작품 등에서 이것을 볼 수 있다. 미디어아트의 특성상 과학적 공학적인 지식과 예술적 감성이 합해질 수밖에 없으며 “과학과 예술을 통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술가들과 과학자의 경계를 허물기도 한다”(/ p.224). 알고리즘 예술이나 건축 디자인의 다이어그램 등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 책의 제목에서 미디어아트를 ‘X(엑스)예술’이라고 한 것은 이러한 미디어아트의 성격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다. “미디어아트는 얼핏 기존의 예술장르들을 종합하여 하나의 총체예술을 구현하는 듯하지만, 알고 보면 그것은 기존 예술의 규칙들을 깨는 일탈 행위인 것이다. …개별 예술의 장르는 분업적으로 자신의 경계와 규칙을 만들어놓았다. 미디어아트는 이러한 분업의 관행을 따르지 않으며 오히려 개별 장르의 규칙들에서 일탈한다. 왜냐하면 미디어아트가 사용하는 매체인 뉴미디어 자체가 시각적인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청각적이기도 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디어아트는 기존의 개별 장르의 규칙들로 설명할 수 없는 미지의 ‘X예술’이다. 전통적인 예술의 규칙에 적용하면 미디어아트는 예술이 아닌(X) 예술이기도 하다. 미디어아트가 총체예술작품이 아닌 ‘X예술’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p.9)
미디어아트의 예술세계와 작가와 작품들, 그리고 예술로서의 새로운 가능성을 조명하고 있는 [미디어아트는 X예술이다]는 지난 2년여 동안 [주간한국]에 “미디어아트 프리즘”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던 글들을 새롭게 묶은 것이다. 마치 미디어아트의 콜라주 작품처럼 39개의 단편적인 글들로 미디어아트의 가능성과 한계, 최첨단 예술인 미디어아트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들을 이야기하면서, 미디어아트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철학자가 쓴 미디어아트 비평문인 만큼 미디어아트의 문제의식과 철학적 논의가 자유자재로 연결되며, 기존의 거의 모든 예술 장르에 관심을 기울여온 필자의 오랜 노력을 책에서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
<목차>
머리말: 미디어아트는 X예술?제1부 전통예술을 확장하다
자본주의 사회의 배설물을 담다―김병호의 ‘제품’
죽음을 담다―샘 테일러우드의 [작은 죽음]
숭고의 예술이 되다―빌 비올라의 비디오 예술
빛을 표현하다―리 후이의 [환생]
전통예술 속에도 존재한다―하이퍼리얼리즘 속의 미디어아트
여성의 몸을 해부하다―오를랑의 신체예술
사후세계와 통하다―로이 애스콧의 미디어아트
광기의 예술을 만들다―미디어를 통한 무의식 세계의 확장
기호 이전의 이미지를 표현하다―카이페스의 [목격]
전통회화의 아름다움을 계승하다―이이남의 ‘디지털 병풍’
여성적인 것이 되다―앤디 워홀의 [뷰티 2번]
전통예술에 대한 오마주를 표현하다―디지털 그래픽 예술
익숙한 낯섦을 창조하다―디지털 로봇 예술
제2부 전통예술을 넘어서다
사진의 진실을 파괴하다―페데로 마이어의 [5달러 지폐]
운명을 점치다―제프리 쇼의 [웹 오브 라이프]
관음증적 시선을 담다―모리스 베나윤의 [워치아웃]
잠재현실을 만들다―샤 데이비스의 [오스모스]
온몸을 자극하다―모호이너지의 [모듈레이터]
불가능한 공간을 만들다―로베르트 라차리니의 [해골]
소통의 불가능성을 암시하다―이자와 코타의 [레논, 손택, 보이스]
얼굴을 해체하다―디지털 이미지와 [페이솔로지]
엄친아를 만들다―‘프랙털 예술’
인공언어의 세계를 꿈꾸다―새로운 언어로 만들어진 예술
트랜스섹슈얼리티를 꿈꾸다―스텐슬리와 울퍼드의 [인터스킨 시스템]
디지털 패러다임을 제시하다―아니시 카푸어의 ‘아르셀로미탈 궤도’
인공생명을 꿈꾸다―디지털 기술과 ‘생성예술’
제3부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다
새로운 세계를 디자인하다―프랭크 게리의 구겐하임 미술관
새로운 무용의 세계를 펼치다―빌 존스의 [고스트캐칭]
새로운 콜라주의 세계를 펼치다―강홍구의 [오쇠리 풍경]
X예술이 되다―태싯의 [게임 오버]
이미지로 시를 쓰다―장영혜중공업의 구체시
새로운 패션을 만들다―후세인 샬라얀의 미디어패션
알고리즘의 세계를 창조하다―베로스트코의 알고리즘 예술
귀로 듣는 공간을 창조하다―이언 모트의 [사운드 매핑]
소음으로 음악을 만들다―브랜든 라벨의 소리예술
영화를 넘어서다―더글러스 고든의 [몬스터]
시간을 요리하다―댄 그레이엄의 [시간이 지체된 방]
공공적이지 않은 공공예술이 되다―미디어 건축물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넘어서다―정연두의 [낮잠]
머리말: 미디어아트는 X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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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중에서>
-미디어아트, 새로운 세계를 디자인하다.(프랭크 게리의 구겐하임 미술관)
...디지털 건축 디자인 이후 건축에서 다이어그램의 역할이 크게 부각되었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3D 디자인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디자인할 경우 상상으로 그리는 그림이 곧 시공을 위한 도면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이러한 상황에서 건축 디자인은 점차 공학적인 마인드가 아닌 에술적 마인드를 필요로 하게 된다. 말하자면 엄격한 도면을 만드는 공학적인 능력보다는 상상력을 바타으로 한 다이어그램을 만드는 능력이 더 필요한 것이다. 프랭크 게리의 건축 디자인은 이를 보여주는 훌륭한 사레이다.
-미디어아트, 새로운 무용의 세계를 펼치다. (빌 존스의 <고스트 캐칭>)
...한 겨울인 1960년 1월 4일...자동차 한 대가 가로수를 들이받은 채 찌그러져 있었다.
...실존주의 문학가로 알려진 알베르 카위와 프랑스 최대의 출판사 갈리마르의 사장 미셸 갈리마르...
두 사람 모두 사망하였다.
까뮈의 죽음은 너무나도 드라마틱한 것이었다.
그가 사고를 당했을 때 입었던 옷의 주머니에는 기차표가 들어 있었다. 그는 원래 그 시간대에
보르도에서 기차를 타고 파리로 갈 계획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절친한 친구였던 갈리마르의 제안으로
계획을 바꾸어 기차가 아닌 자동차로 파리에 가게 되었건 것이다.
그런데 카뮈의 죽음이 드라마틱한 이유는 단지 그 때문만은 아니다.
다소 어처구니없는 그의 죽음은 어쩌면 가장 까뮈다운 죽음일지도 모른다.
그의 실존철학을 꿰뚫는 가장 중요한 개념은 '부조리'이다.
부조리란 이치에 맞지 않는 엉뚱하고도 역설적인 상태를 뜻한다. 그래서 이 어처구니 없는 해프닝이야말로
그가 말한 부조리에 가장 어울리는 죽음처럼 느껴지는 것은 전혀 억지가 아니다. 그는 삶(실존)이 부조리한
것임을 힘주어 말했지만, 죽음마저도 부조리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셈이다.
카뮈가 삶을 부조히한 것이라고 강조한 것은 전적으로 자유에 대한 갈망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고자 갈망한다. 돈을 벌고자 하는 것도 물질적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함이며,
사회적으로 성공하고자 하는 것도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음으로써 그들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자유롭고자 함이다. 하지만 그러한 까닭에 인간은 결코 자유롭지 않다. 왜냐하면 자유롭고자 한다는 것은 곧 현실의 구속이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현실에 대한 구속이 없다면 자유에 대한 갈망 자체가 없을 것이다.
자유롭고자 함은 곧 현실의 구속을 전제한다. 인가이 더 이상 자유롭기를 갈망하지 않는다면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닐것이다. 따라서 자유란 항상 구속을 전제하며, 결국 인간은 구속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삶의 '부조리'인 것이다. 부조리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죽을때가지 벗어날 수 없는 삶
그 자체의 모습이다. 자유와 구속은 부조리한 삶이라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즉 자유란 부조리의 한 양상
이며, 구속이 없는 자유란 그저 비현실적인 신기루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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